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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의 영광 / 사무엘 즈웨머

사무엘 즈웨머는 대학교 졸업반인 1887년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졸업 후, 그는 다른 여러 명의 학생과 함께 아라비아 선교를 위한 팀을 꾸렸습니다. 23년간 바레인(Bahrain)과 쿠웨이트(Kuwait,)에서 섬김을 마친 뒤,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설교와 집필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무슬림 지역의 교회들을 후원하기 위한 연구와 교육을 통해 여러 권의 책과 기고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사무엘 즈웨머는 아랍세계에 대한 위대한 사도로 여겨집니다. 아래 원문은 1911년에 그가 작성한 기고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비(非)점령지에 대한 도전은 위대한 신앙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큰 희생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모험적인 도전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의 의지는 항상 그 모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비례합니다. 믿음은 희박한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데 천재적입니다. 한번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것이 성취되기 전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철(鐵)의 공작(公爵), 아서 웨즐리(Arthur Wesley, Duke of Wellington) 경이 말했듯이, 우리는 “진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총사령관께서 함께하시기에, 불가능은 이제 실천적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설교 중 “모든 능력을 내게 주셨으니… 나는 당신과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외의 요소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어떤 바보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수행하십시오.”

 

뒤바뀐 향수병(선교지에 대한 향수병) An Inverted Homesickness

세상의 비(非)점령지는 주를 위해 기꺼이 외로워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보이시며 나눴던 말씀은 선교지의 선구자들에게 매우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개역개정)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곳은 거대한 선교적 비점령지였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 1:11, 개역개정) 그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조롱, 고난의 삶, 그리고 십자가의 보좌였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는 우리가 떠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선구자적 선교는 주님과 그분의 부활 능력에 대해 알 수 있는 특권일 뿐 아니라 또한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티베트, 소말리아, 몽골, 혹은 아프가니스탄, 아라비아, 네팔, 그리고 수단과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개역개정, 마가복음 12:44, 누가복음 21:4 참고) 이것이 불가능의 영광입니다! 그 누가 따뜻한 난로와 편안한 집,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을 떠나 폭풍의 울부짖음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떠나고자 하겠습니까? 이것은 위대한 과업의 영광이며 가정의 필요, 가족들조차 위대한 목자의 영과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잃어버린 것은 그분의 양이고, 그분은 우리를 삯꾼이 아닌 그분의 목자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반드시 잃어버린 양을 찾아와야 합니다.

비록 이 길이 거칠고 가파르지만,
나는 내 양을 찾기 위해 광야로 갑니다.

포르시스(Forsyth) 박사에 의하면, “선교사님들이 옛집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본국에서 잊히며, 그들이 섬기고 양육했던 사람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애처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본국의 의미로 쓰임)에서 쉼을 얻을 수 없고, 그들이 주님을 위해 마음을 쏟았던 곳에서 뼈를 묻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보편적인 애국심은 이러한 뒤 바뀐 향수병 앞에선 얼마나 천박한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정에는 국경도 없고, 편애하는 인종(人種)도 없으며, 머리 둘 곳이 없는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몽골의 제임스 길모어(James Gilmour), 중앙아프리카의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콩고의 그렌펠(Grenfell), 아라비아의 케이스 팰코너(Keith Falconer), 티벳의 린하르트 박사(Dr. Rijnhart)와 애니 테일러(Miss Annie Taylor), 뉴기니의 찰머즈(Chalmers), 중국의 모리슨(Morrison), 페르시아의 헨리 마틴(Henry Martyn), 그리고 이들과 같은 모든 사람에게는 “뒤바뀐 향수병”이 있었습니다 – 이 열정은 복음이 가장 필요한 나라들을 고향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이 열정 안에서 다른 모든 열정은 죽어버립니다. 이 비전 앞에서 다른 모든 비전은 희미해집니다. 이 부르심은 다른 모든 목소리를 사라지게 합니다. 그들은 왕국의 개척자들로서, 하나님의 정복자들로서, 국경을 넘어 행진하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제국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도(使徒)적 야망 The Apostolic Ambition

이미 점령된 지역의 중심지가 인원이 부족하고 추가지원이 필요한 곳이라 하더라도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자 하는 야망은 비현실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도(使徒)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20-21, 개역개정)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만큼이나 중요한 도시를 떠날 때 이 편지를 썼으며, 이것이 그가 아직 로마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라고 설명하며 훗날 스페인으로 향할 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1세기에 로마제국의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미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리리쿰까지 복음을 전한 그의 계획이었다면, 20세기의 시작점에 사는 우리 역시 모든 비점령지의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과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기 위한 야망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강력한 명령의 강요를 받아 외국으로 나가게 된 사도들에 관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명된 사명자로서 그의 약혼자가 되려는 연인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모두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공통된 비전으로 지배되었지만,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끌어들여진 몇 가지 개인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처음 시작에는, 계산적인 생각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도는 팔레스타인 밖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는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때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인간적인 사고가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산적인 본능은 믿음에서는 죽음이며, 사도들의 동기와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필요성은 너무 크고, 우리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하며, 우리는 자선의 행위가 본국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모든 성지의 백성들을 얻은 뒤에야, 해외로 나아갈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문제들은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데 우리의 어깨 위에 “새로운 길”이라는 짐을 지우는 것은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초기 교회를 흥분시켰던 것은 그 일의 경이함과 어려움이었습니다. 이 일의 분명한 불가능함은 그 일의 영광이자 세계적인 기질, 장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니시마(Neesima)는 저서인 “나는 행복합니다”(I am happy) 에서 “세계에서 기독교의 경이로운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면, 마치 흐르는 강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오히려 더 빠르게 흐르듯이 어떠한 장애물이라도 여전히 빠르고 신속하게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인내 Hope and Patience

처녀지(處女地)를 개간하는 사람은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농부들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씨를 뿌리고 나면 언제나 추수하는 때가 옵니다. 중앙아시아의 호스버그(Hosberg) 선교사에 의하면 “우리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수의 사람도 모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모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나 소책자를 전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건물이나 작은 예배당을 지을 때도 “이 방이 복음을 듣는 무슬림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우리의 작은 예배당은 청중들과 더 큰 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힘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무슬림들도 이제는 복음의 진리를 듣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한 무슬림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오기 전까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디서든 누구나 그분의 이름을 듣습니다.” 사역의 초창기에 그들은 성경을 버리거나 불태우고, 혹은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 이제 그들은 성경을 구매하고, 입을 맞추며, 이마에 닿게 하며 가슴을 향해 누릅니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책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외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척자 농부들에게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드슨(Judson)이 버마(현 미얀마) 있는 지하감옥에서 사슬에 묶인 채 있을 때, 동료 죄수들은 비웃으며 이교도들의 개종 가능성에 관해 물었습니다. 저드슨은 침착하게 “그 가능성은 하나님의 약속만큼이나 밝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드슨이 직면하고 극복했던 미얀마와 같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더 어려움이 있는 나라는 오늘날 거의 없습니다.

 

닫힌 문을 향한 도전 Challenge of the Closed Door

비(非)선교지의 복음화에 대한 전망은 “하나님의 약속만큼이나 밝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로버트 E. 스피어(Robert E. Speer) 에 따르면, “이 세대에게 있어서 세계의 복음화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주의하게 언급되는 움직임도 아닙니다. 이 세대에게 있어서 세계의 복음화는 모든 제자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부유하였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이며, 우리를 통해 그의 가난함이 부요해지는 것이고, 그분의 생명을 셈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누가 비(非)선교지를 위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자원봉사자 학생들은 제일 많이 방치된 어려운 들판과 곡식이 익고 계속해서 수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구하는 나라들에서 그들의 좌우명이 실제적인 적용을 발견할 때까지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주의는 선교의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열린 문이 손짓하고 있습니다. 닫혀있는 문은 도전할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의 비선교지는 특유의 부담감과 긴급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비선교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개탄스러운 상황을 이른 시일 안에 치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생활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라. Make a Life, Not a Living

따라서 비선교지는 삶이 가장 높은 것과 최선의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전입니다. 그들의 삶은 오직 연약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위대한 비전을 비춰보지 못한 눈들과 이타적인 생각에 매여있지 못해본 마음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위한 열정으로 인해 흥분하지 않은 마음들, 그리고 큰 짐을 덜어주기 위해 연약해지거나 힘을 쓰지 않은 손들이 있습니다. 비선교지의 그리스도를 모르는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한 지식은 마케도니아에서 온 새로운 부르심과 그들을 향한 깜짝 놀랄만한 하나님의 뜻(비전)과 같습니다. 브렌트(Brent) 주교는 “우리의 도덕적 수용력의 척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실제로 그에 대한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젊은이가 결정을 내리거나 자신의 성숙함을 고쳐야 할 정도로의 모험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선교지의 선구자가 되는 것보다 자신의 성숙함에 대해 영웅적인 시험이 있습니까?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위한 활동을 찾지 못하고 마음과 영혼의 능력을 위한 충분한 기회를 찾지 못하는 본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기회가 여기 있습니다. 수 백 명의 기독교인 대학생들은 그들이 법을 배우거나, 생계를 위해 무역을 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아직 비선교지로 들어가기 위한 힘과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와 이슬람의 공포에 시달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는 새로운 선교기지에 젊은 의사들이 모여서 고통의 짐을 덜어줄 수 있으나, 그들은 지금 치유행위는 경쟁법에 어긋난다는 “갇힌 유티카”와 얼마나 수익성이 있는지에만 기준을 두는데 자신들의 능력을 한정 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만들 수 있는데,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 주교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 이 중요한 임무에 대한 도전을 던졌습니다: “쉬운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더 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능력에 맞는 과업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과업에 맞는 능력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일이 기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기적이 될 것입니다.” 그가 만일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영광스러운 불가능과 함께 세상의 비선교지의 복음화를 위해 글을 썼다면 더 적절한 단어들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과업을 위한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길을 떠난 자들과 오늘날 길을 떠나는 자들에게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얼굴을 어둠과 수모 속에서 맞대고, 그 나라들을 다녀온 사람들의 확실한 간증을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해 알며, 이 위대한 미완수된 임무, 시도되지 않은 임무가 오늘날 그것을 위해 기꺼이 견뎌내고 고통을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희생이 아닌, 특권 No Sacrifice, But a Privilege

1857년 12월 4일, 데이빗 리빙스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는 당시에 비점령지와 다름없던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 열렬한 호소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관해 대학생들에게 전한 그의 마지막 의지와 증언의 말이 이 기고문을 맺는 데에 적절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내게 그러한 일을 맡기신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많은 일생을 보내며 희생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이것을 절대 갚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외에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건전한 행위, 선한 일을 하는 것, 마음의 평화, 그리고 영광스러운 운명의 밝은 희망을 비추는 상급을 전하는 것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시선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이것은 단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불안함, 질병, 고통 혹은 위험과 더불어 앞서 말한 일상적인 편의와 자선 행위들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영혼을 흔들고, 가라앉게 하지만 이는 잠시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장차 드러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절대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기를 구합니다. 몇 년 뒤면 지금은 열려있는 그 나라에서 저는 추방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이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십시오!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상업유통과 기독교를 위해 길을 열 것입니다. 제가 시작한 이 일을 수행하십시오. 이 일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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